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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551호] 한국 민주주의, 정당 없는 광장의 시대

작성자대학신문방송국  조회수11 등록일2025-07-03

한때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던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날 심각한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강력한 대통령 직선제, 독립적인 선거관리위원회, 견제와 균형을 위한 대법관 임기제 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가 작동하는 현실의 모습은 우려를 낳는다. 


정치의 일상은 점차 ‘민주주의의 규칙’보다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극단적인 정치 혐오와 양극화, 민주주의 피로감이 확산되고 있다.


책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는 민주주의의 붕괴는 쿠데타나 혁명이 아닌, 제도 안에서의 규범 파괴와 반민주적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경고한다. 이들의 논의는 미국 정치를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여야 정권 교체 이후 꾸준히 높은 정치체 점수를 유지해 온 한국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정당 간 적대, 정체성 정치, 광장 중심의 정치 동원 등 민주주의 규범을 위협하는 징후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당 정치가 사실상 ‘광장 정치’에 자리를 내주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단위였던 정당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대규모 집회나 SNS를 통해 여론을 동원에 의존하며, 이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정당 내부 숙의와 타협 과정을 생략한 채, 다수의 목소리를 ‘민심’으로 포장하여 정책 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2016년 촛불집회의 긍정적 경험은 상시적인 광장 정치의 기반이 되었고, 정치인들은 정당 내 책임보다 거리의 이미지 관리와 팬덤 동원에 집중하게 됐다.


이러한 정치 환경은 정치적 정당성과 동원 능력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대규모 집회는 ‘정치적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반대 의견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위축된다. 정치 경쟁은 정책과 비전보다 생존을 건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


대통령의 사면권과 입법 거부권이 정쟁 수단으로 남용되고, 국회의원 3분의 2 동의가 필요한 탄핵제도조차도 정치적 무기로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정치의 사법화’ 역시 심화되고 있다. 정책과 정치적 분쟁이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실질적인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법정에서 패소했을 때 이를 수용하지 않고 사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향후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성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논란은 한국 정치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시민들의 강한 저항은 제도 밖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지만, 이후 펼쳐진 정치 상황은 광장 정치의 위험성과 정당 정치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선거 불신, 음모론, 정치인의 책임 회피는 미국식 ‘탈진실 정치’와 닮아가고 있으며, SNS와 여론전은 정당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당은 이제 정책보다는 팬덤과 동원력으로 움직이며, 광장에서 부상한 정치인이 당을 장악하고 대통령은 여당 위에 군림한다. 의회는 여야의 극단적 대립 속에 정쟁의 무대가 되었고, 정당 내부의 자율성은 실종됐다.


민주주의 회복은 제도만으로 불가능하다. 갈등을 제도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광장에 맡기면 민주주의는 본래의 궤도를 잃게 된다. 정치인들은 책임 있는 지도력으로 정당 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시민들은 비판적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키려는 시민의 의지와 정치인의 절제가 함께할 때만 민주주의는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글 조혜원 기자